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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

[독후감] 비밀 / 히가시노 게이고 (2)

by Manoh 2024.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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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내용 전반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 어제에 이어서 '비밀'의 스포일러 독후감을 마저 작성하려 한다. 소설 내용 전반을 요약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는 않지만, (글을 쓰는 게 어려운게 아니라, 글을 요약하는 게 어렵다.) 스토리를 다시금 곱씹어보며 처음엔 생각하지 못한 것들에 대해 좀 더 깊게 사유할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는 것 같다.

 

 

* [스포일러 독후감] 비밀 / 히가시노 게이고 (1) 링크 : https://manoh.tistory.com/82

 

 

# 헤이스케는 분노, 질투 그리고 후회, 미안함 등 여러 감정들이 얽혀 힘든 시간을 보냈으나, 버스기사였던 가지카와가 왜 그렇게 과로운전을 했는지에 대한 진실을 알고나서 심경에 변화가 생긴다. 가지카와는 전처가 낳은 아들인 후미야가 당연히 자신의 아들인 줄 알고 사랑으로 키웠으나, 사실은 아니었다는 진실을 알고 집을 떠난다. 그러나 이후 전처가 형편이 안 좋아지면서 아들의 대학 지원이 힘들어진 걸 알게 된 후 자기가 사랑했던 아들의 행복을 위해 모든 진실을 숨기고 비밀리에 대학 지원금을 보내주기 위해 그렇게 무리하게 된 것이었다. 자신은 아들에게 생각도 하기 싫은 사람, 가족을 버린 사람이 됐음에도 자기가 친아버지인 것이 아들에게는 더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꺼이 그 오명을 쓴 것이다. 헤이스케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쪽을 선택해준다'는 그의 말을 곱씹고 곱씹으며 한가지 결심을 한다. 모나미가 된 나오코를 더 이상 자신의 아내가 아닌, 딸로서만 사랑해주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행복한 쪽일 것이라 믿고 말이다.

 

 

이미 다 알고 있었어, 라고 그는 생각했다.

굳이 답을 찾을 것도 없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미 몇 년 전부터 다 알고 있었다.

- 헤이스케, 네기시 노리코(가지카와의 전처)를 만나 후의 독백

 

 

# 헤이스케는 나오코와 둘이 있을 때는 항상 그녀를 모나미가 아닌 나오코로 불렀다. 하지만 그 결심을 한 후 나오코에게 진심을 담은 사과를 하며 더 이상 그녀를 나오코로 부르지 않고 모나미라고 부른다. 오로지 나오코의 행복을 위해 나오코라는 이름을 지우는 모순적인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다. 헤이스케의 사과를 들은 나오코는 울면서 방에 들어가 내내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신의 장난인 것인가. 다음 날 나오코가 걱정되어 그녀의 방에 들어간 헤이스케는 그녀에게서 위화감을 느낀다. 모나미의 영혼이 돌아온 것이다.

 

 

"모나미."

"오랫동안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야."

- 헤이스케, 나오코를 위해 그녀를 모나미라고 부르며 사과를 한다

 

 

# 이 때부터 그들의 동거는 더욱 기묘해진다. 모나미는 사고 이후 기억이 전혀 없는 상태였으며, 잠을 자고 나면 나오코와 모나미가 번갈아가며 몸을 차지하는 상태가 된다. 모나미의 입장에서는 초등학생이었던 자신이 스키버스에서 사고가 난 후 깨어나보니 고등학생이 되어있는 상황. 나오코는 모나미에게 편지를 써가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들과 하고싶은 말들에 대해 상세히 적어둔다. 헤이스케는 모나미의 영혼이 돌아온 것이 놀라우면서도 기쁘기 그지 없었고, 모나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나오코와의 관계도 서서히 회복이 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 앞으로 다가오는 슬픔을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모나미가 나오코로 있는 시간이 줄어들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 이제 당신 못 만날지도 몰라."

"왜, 또?"

"이건 내 일이니까 내가 잘 알아. 이렇게 조금씩 사라질 거야."

"그러지마. 그럴 일 없어."

- 다가오는 미래를 받아들이는 나오코와 이를 외면하는 헤이스케의 대화

 

 

# 어느 토요일 오후, 헤이스케는 말끔하게 준비하고 나오코를 만나러 간다. 장소는 나오코와 처음으로 데이트를 한 야마시타 공원이다. 손에는 나오코가 좋아하는 가수의 CD와 카세트가 있다. 이 곳에서 헤이스케와 나오코는 마지막 작별인사를 한다. (덤덤하게 안녕을 고하는 나오코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마워. 이제 안녕이네. 나, 잊지 말아줘."

- 나오코의 마지막 한마디

 

 

두 사람의 마지막 순간에 들려온 노래. 마쓰토야 유미의 <저물어가는 방>

 

 

# 몇 년 후, 모나미는 대학병원에서 인턴으로 뇌 의학을 연구하는 의사가 되었고, 헤이스케와 같은 회사에 입사한 후미야(가지카와의 아들)와 결혼을 하게 된다. 대망의 결혼식 날 헤이스케는 우연히 모나미의 결혼반지가 나오코의 결혼반지를 가공한 것임을 알게된다. 헤이스케에게는 그 사실을 철저히 비밀로 하고 말이다. 나오코의 결혼반지에는 특별한 이야기가 있다. 처음 모나미의 몸에 나오코가 들어왔을 때, 그들은 이 사실을 남들에게는 숨기기로 결정하면서 나오코의 결혼반지를 모나미의 곰인형 속에 숨겨놓고 영원한 둘만의 비밀로 하기로 맹세했다. 그런데 모나미가 그걸 어떻게 알고 찾았단 말인가. 설사 나오코가 편지로 모나미에게 알려줬다고 해도, 그렇다면 굳이 헤이스케에게 비밀로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 이 때 비로소 그는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는다. 모나미는 돌아온 것이 아니었다. 헤이스케가 나오코를 오로지 자신의 딸로서만 사랑하며 살기로 결심하고 그녀를 나오코가 아닌 모나미로 불렀던 바로 그날, 나오코 역시 그 말의 의미와 그 속에 담긴 헤이스케의 각오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 역시 모나미가 다시 돌아온 척 연기하며 스스로를 지워간 것이다. 야마시타 공원에서의 마지막 데이트 때, 헤이스케만이 나오코와 작별한 것이 아니었다. 나오코 역시 그녀 자신과 작별을 한 것이다. 진실을 알고 헤이스케는 부리나케 신부대기실로 달려갔지만,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나미, 아니 나오코를 마주한 후 그녀의 결심과 그녀가 만든 비밀을 지켜주기로 마음먹으며 소설은 끝이 난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해도 부질없다. 물어본들 아무 의미가 없다.

그녀는 결코 인정하지 않으리라. 자신이 나오코라는 것을.

- 헤이스케, 웨딩드레스를 입은 나오코를 보면서

 

 

# 어제도 얘기했듯 소마와의 만남이 들통날 때까지는 헤이스케의 마음에 좀 더 공감이 갔던 게 사실이다. 나오코는 다시 젊음을 되찾아 자신의 삶을 다시금 개척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얻는다. 하지만 헤이스케는 그대로이지 않은가. 아마 나오코가 고등학생이 됐을 무렵 헤이스케는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정도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자신은 인생의 반환점을 도는 시점에서 사랑하는 아내가 젊음을 되찾고, 또 그 젊음을 함께 만끽할 남자들과의 교류가 많아지면 누군들 질투심이 안날까. 때문에 헤이스케가 나오코를 오로지 자신의 딸로서만 사랑해주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정말 큰 결심이고 희생이라고 생각을 했다.

 

 

# 하지만 결말을 읽고 나니 나오코의 삶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었다. 어쨌거나 헤이스케는 온전히 헤이스케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나오코는 대외적으로는 모나미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젊음을 되찾는다는 것이 물론 좋은 일이긴 해도 어디까지나 딸을 대신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오코는 온전하게 나오코로서 살고 있지는 못했고, 그것이 그녀에게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몇 년만에 모나미로 친정에 방문한 후 다시는 가지 못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자신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본인은 살아있는데 가족들이 본인의 죽음을 기리고 있는 걸 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그랬던 나오코가 유일하게 나오코로서 살 수 있던 상대방이 바로 헤이스케였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서로 간의 사이가 좋든 안좋든 어쨌거나 헤이스케 앞에서 그녀는 모나미가 아닌 나오코였다. 그랬던 그녀가 스스로를 지우고 모나미로서만 살아가겠다고 마음먹는다는 것은, 나오코의 유일한 이음줄인 헤이스케와의 연결도 끊는다는 것은, 사실상 나오코의 육체 뿐 아니라 영혼까지 포기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 많이들 알겠지만, 원피스의 유명한 대사로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서 잊혀졌을 때다"가 있다. 나오코는 헤이스케와의 연결를 끊음으로서 진정한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가 모나미를 연기하는 것이든, 진짜로 모나미가 돌아온 것이든 그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 나오코가 나오코로 살 수 있는 그 어떠한 연결고리도 더 이상은 없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각오를 할 수 있었을까. 그건 결국 사랑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헤이스케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이기에 그의 결심에 따라주기로 한 것이다. 헤이스케는 나오코가, 나오코는 헤이스케가 행복한 쪽을 선택한 것이다.

 

 

# 하지만 헤이스케와 나오코가 서로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선택했음에도, 나는 그 선택이 해피엔딩같지 않아 더욱 마음이 아팠다.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진정으로 서로의 행복을 위하기에 그들은 영원히 비밀을 혼자서만 간직하고 살아야한다. 가지카와의 비밀은 결국 들통났지만 그래도 아들의 존경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헤이스케와 나오코의 비밀은 오롯이 서로만을 위한 것이고, 서로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나중에 헤이스케나 나오코가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제3자에게 고백했을 때, 그걸 백퍼센트 믿어 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책을 덮은 후, 먼 훗날 사후에 두 사람이 다시 만나면 헤이스케와 나오코로서의 행복한 삶을 다시 살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 책의 마지막을 읽으면서 참 마음이 아팠고, 새삼 우리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기도 하였다. 결국 사람은 자신의 행복이 아닌 상대방의 행복을 위한 선택을 함으로써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는 어떨까. 나는 내 친자식이 아닌 아이를 위해 내 몸을 갈아가며 일을 할 수 있을까?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녀를 진정으로 보내줄 수 있을까? 헛된 망상이라고 치부하기보다는, 이런 상황에서 나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성장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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