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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단상

떠나는 사람은 머문 자리를 아름답게 하자

by Manoh 2024.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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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주부터 육아휴직이 시작되면서 나도 이제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자료도 정리하고 나름의 매뉴얼도 만들고 있다. 육아휴직을 결재받고 나서부터 새로운 일을 벌이는 것보다는 현재 진행중이던 업무들을 깔끔하게 정리하는 것을 목표로 업무방향을 바꿨고, 덕분에 큰 건들은 대부분 마무리짓고 휴직에 들어갈 수 있어 마음이 한결 놓인다. 그래도 나머지 자잘한 것들이나 업무 전반에 대한 매뉴얼 정도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문서작업을 하고 있다.
 
# 많은 직장인들이 공감하겠지만 새로 보직을 부여받을때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업무 초반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 특히 공무원 사회처럼 주기적인 순환보직 시스템을 가진 직장에서 이런 케이스가 많다. 나도 공기업에 재직 중이기 때문에 비슷한 경험들을 많이 보고 들었는데, 내 전임자는 정말 역대급이었다.
 
# 내 전임자도 마찬가지로 휴직을 하면서 내가 그 보직을 맡게 되었는데 처음 왔을때 말 그대로 개판 5분전이었다. 서류철은 뭐 하나 제대로 되어있는게 없어서 거의 근 1년간의 자료가 전무했고, 시스템에서 제대로 처리하지 않고 계류중인 건들이 30건이 넘어갔었다. 심지어 과거 감사실에서 지적받았던 건들도 거의 처리하지 않고 방치되어있었다. 당연히 참고자료나 근거자료도 없었기 때문에 어떤 내용인지 파악하는데만 한 세월이 걸렸다. 인수인계 할 당시에는 본인이 큰 건은 많이 정리하고 간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나는 해당 보직을 처음 접하는지라 뭐가 뭔지도 모른 채 일단 믿고 들어왔는데, 사태를 파악하고 내가 느낀 참담함을 되새겨보면 아직도 두 주먹이 불끈 쥐어진다.
 
# 원래 폐급으로 소문난 직원이었지만 이정도로 개판을 쳐놨을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이래저래 욕먹고 몸빵으로 부딪혀가며 전임자의 똥을 치우는데만 거의 1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래도 주변 동료들과 상사들이 내가 고생했다는걸 다 알아주고 인정해주니까 버틸수 있었지, 전임자가 싼 똥으로 내가 욕까지 먹었으면 억울해서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 아이러니한게 내가 휴직을 쓰고 얼마 후 그 직원이 복귀하기 때문에 아마도 전임자가 다시 내 대체자로 오게 될 것 같다. 이미 모든 부서들이 그 직원은 안받겠다고 난리난리를 치고 있으니 다른 부서에 갈 가능성이 거의 없기도 하다. 때문에 맘같아서는 나도 정말 개판쳐놓고 아무 인수인계 없이 그냥 휴직을 들어가고싶지만, 결국 그건 내 얼굴에 침뱉기 아닌가. 또 상황이 바뀌어서 그 직원이 아니라 다른 직원이 내 자리를 대체할 수도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정리해놓고 휴직에 들어가려고 한다.
 
# 공중화장실에 가면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는 문구를 자주 볼 수 있다. 화장실에서뿐 아니라 모든 곳에서 통용될 수 있는 문구라 생각된다. 전세집에서 살고 나올때도,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올때도, 하다못해 헬스장 머신에서 운동을 하고 나와도 최소한 다음 사람이 '나로 인해' 불편을 느낄만할 것들은 최대한 정리하고 나와야하지 않을까? 나도 영원히 퇴사하는것도 아니고 몇 개월 후 다시 돌아올 사람이니, 머문 자리를 아름답게 만들고 나중에 돌아와야 환영받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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