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도에 개봉한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내가 꼭 보고 싶었던 영화 중 하나였다.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는 하드보일드한 분위기가 맘에 쏙 들었기 때문이다. (포스터에서도 '하드보일드 추격액션'을 강조하던데, 강조한 부분이 잘 표현된 영화였다.) 한국영화가 워낙 시작이 어떤 장르였던지와 상관없이 막판에 신파를 넣어 욕을 많이 먹지 않는가? 나 역시 뜬금없는 신파가 나오면 김이 팍 식는 스타일이라 처음부터 끝까지 한 우물만 파는 영화들을 더 좋아하고, 이 영화 역시 그런 영화 중 하나였다.
# 스토리는 전 국정원 요원, 현 살인청부업자인 김인남(황정민)이 오래전 헤어진 자신의 아내가 죽고 딸 유민이 납치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이다. 테이큰처럼 이제는 사골에 가까운 소재라고 할 수 있지만, 이 영화는 생각보다 아버지의 딸에 대한 사랑이 강조되지는 않는다. 인남은 딸에 대한 사랑보다는 책임감에 기반하여 모든 일들을 해나가는 모습을 보인다. 딸에 대한 사랑이 아닌 '아내에게 했던 것과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딸을 챙기기도 하고, 굳이 유민에게 자기가 아빠라고 하지도 않고 그냥 스스로를 아저씨라고 칭한다. (사실 자신에게 자식이 있었는지도 몰랐다가 죽은 아내를 목도한 후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그동안 없었던 부성애가 갑자기 생긴다는 것도 어폐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영화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이성적이고 차갑게 흘러가는데, 인남의 부성애가 덜 강조되는 것도 이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한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덕분에, 영화 후반부 인남이 유민에게 잠시나마 아빠 노릇(?)하는 장면이 더욱 애틋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때의 황정민의 연기도 압권이었다.)
# 영화의 하드보일드함을 완성시켜준 인물은 단연코 레이(이정재)라고 할 수 있다. 레이는 영화 극초반에 인남이 청부살인한 야쿠자 고레다의 동생으로, 형을 죽인 자와 관계된 모든 사람을 말 그대로 도축해 버린다. (과거 아버지가 백정 출신으로, 유튜브 쇼츠에서 많이 나오는 '유감스럽지만은, 이것이 나의 방식이야.'라는 대사는 고레다의 살해를 중개한 브로커를 도축하면서 하는 말이다.) 사람을 개돼지같은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게 대하는 그의 눈빛과 말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고, 그가 인남을 죽이려 하는 이유 역시 시작은 형의 죽음에 대한 복수 비슷한 것이었을지 몰라도 영화 후반부에 가면 단순히 도축할 대상이 필요해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나는 차를 쫓아가는 개야, 막상 차를 따라잡아도 뭘 해야 할지를 몰라"라고 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 아닐까. 조커가 목적 없이 '그냥' 혼돈을 만드는 것처럼 레이도 '그냥' 도축을 하는 것이다. 나중에 레이에게 태국 야쿠자 보스가 왜 그렇게 인남을 죽이려 하냐고 묻자 '이제 기억이 안 난다, 이유는 중요치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광기 그 자체인 레이의 존재감은 영화의 긴장감을 끝까지 팽팽하게 만들어준다.
# 그리고 정말 감탄하면서 봤던게 트랜스젠더 유이를 연기한 박정민이었다. 이번에 찾아보니 내가 박정민이 나오는 작품을 본 것은 2019년의 사바하가 유일하더라. (생각해 보니 그때도 이정재와 연기를 했었더라.) 그때는 크게 임팩트 있진 않았는데, 이 작품에서는 어떻게 저렇게 연기를 잘할 수 있는지 놀라면서 봤다. 자칫 잘못하면 우스워보이기만 할 뻔했던 배역을 박정민이 멱살 잡고 끌어올렸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우는 연기도 중간에 경찰서에서 찌질하게 우는 것과 마지막에 우는 것의 톤이 180도 달랐다. 트렌스젠더라는 한국영화에서 자주 보기 힘든 배역을 맡았음에도 불구하고 태국에 진짜 있을 것 같은 사람같이 너무 자연스러웠던, 그래서 더욱 인상적인 연기였다. (유튜브 쇼츠에서 박정민의 '그것만이 내 세상' 연기도 자주 보이던데 다음에는 그 영화를 볼까 생각 중이다.)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구절이라고 한다. 기독교인이 아니라 저 구절의 정확한 의미가 뭔진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서 '악에서 구해진 사람'은 누구였까를 생각해 봤다. 인남은 악의 세계에 있었으나 그 세계에 환멸을 느껴 도망가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갑작스레 그는 딸의 존재와 그녀가 악에 빠질 위기에 처했음을 알게 되었고, 스스로를 몸 바쳐 딸을 악에서 구해냈다. (이 영화에서의 '악'은 '레이'라는 존재로 실체화됐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는 유이에게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에서 처음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영화 초반, 영혼 없이 그저 사람을 죽이며 살아오던 그가 처음으로 생에 대한 의지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의지로 딸을 악에서 구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그 역시 스스로를 악에서 구해냈다. 악의 세계에 침잠하여 시체처럼 살아가던 그가 구렁텅이에 빠져나와 그의 딸이라는 귀한 유산을 지키고 희생하였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구원된 것 아니겠는가. 아마 인남이 기독교인이었으면, 딸을 구하러 가는 내내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를 끊임없이 되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개인적으로 이런 류의 영화에 꼭 있어야한다고 생각하는 잔인한 묘사도 있었고, 액션씬도 과하지 않고 간결했으며, 쓸데없는 개그나 신파 없이 우직하게 의도한 바를 이끌어낸 좋은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황정민과 이정재의 연기는 말할 게 없고, 박정민도 너무나도 멋진 연기를 보여줘 보는 내내 재밌었다. 하드보일드 영화를 좋아한다면 한번 보는 것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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