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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후기

1917 : 영화를 통해 체험해보는 전쟁의 한 조각

by Manoh 2024. 1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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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7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 전쟁은 영화로 쓰기 참 좋은 소재라고 생각한다. 감동, 멜로, 스릴러, 미스터리, 공포, 심지어 코미디까지 어떤 장르를 붙여도 잘 녹여들며, 표현의 수위도 창작자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높일 수 있다. 소위 말하는 '현실이 더 잔혹한' 경우가 얼마든지 더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전쟁 영화는 매년 빠지지 않고 끊임없지 개봉되면 그에 비례하여 좋은 작품들도 많이 나온다. 그중 '영화적 체험'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가장 높이 평가하고 싶은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한다.

 

# 2020년 초에 개봉한 1917은 그 해 오스카에서 기생충과 작품상 등에서 대결하면서 나의 뇌리에 박혔던 작품이다. (이번에 확인해 보니 촬영상, 음향효과상, 시각효과상을 수상했던데, 특히 촬영에 있어서는 정말 받아야 할 작품이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당시에 영화관에서는 못 보고 이번에 보게 되었는데, 영화관에서 봤다면 얼마나 더 전율이 일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추후 재개봉 소식이 들리면 꼭 보고 싶다.

 

# 스토리는 간단하다. 1917년 4월 6일, 프랑스에서 주둔 중이던 영국 육군부대 소속인 블레이크 일병은 (자막엔 일병이라고 나오는데 정확하게는 lance corporal으로, 일종의 부분대장급 계급이라고 한다. 다만 영국 육군 체계상 아래에서 두 번째 계급이라 일병으로 해석한 것 같다.) 자신의 형인 블레이크 중위가 있는 데본즈 2연대에 도보로 공격 중지 명령을 전달해야 하는 임무를 받게 된다. (독일군이 영국군을 유인하기 위해 철수한 척하며 통신망도 차단해 놨기 때문이다.) 형이 해당 부대에 있고, 지도를 잘 본다는 이유로 블레이크 일병이 차출된 것 같고, 공교롭게 차출 당시 옆에서 누워있던 스코필드 일병이 엉겁결에 동행하게 된다. 이 두 병사가 데본즈 2연대로 떠나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 1917이다.

 

# 이 영화는 스토리가 주가 되는 작품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두 영국군 병사가 명령을 전달하러 가는 여정'이라는 간단한 플롯이고, 중간에 블레이크 일병이 죽게 되면서 스코필드 일병이 진짜 주인공임을 드러내는 일종의 반전이 있는 걸 빼면 결국 데본즈 2연대로 명령을 무사히 전달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이 영화의 진짜 묘미는 앞서 언급한 '영화적 체험'에 있다.

 

# 1917는 중간중간 몇 컷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롱테이크씬으로 구성되어 있다. 초반에는 블레이크 일병과 스코필드 일병의 시점을 번갈아가며 보여주다가, 중후반에는 스코필드 일병의 시점에서 여정을 그린다. 찾아보니 '원 컨티뉴어스 숏' 촬영기법이라고 하던데, 군인의 시점에서 일어나는 여러 사건을 편집 없이 그대로 쫓아가다 보니 내가 실제로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은 생생함을 전달받는다. 거기에 끊임없이 긴장감과 스릴을 부여해 주는 OST가 몰입을 극대화해준다. 다른 어떤 전쟁영화보다 이 영화가 현장감만큼은 가장 잘 전달해주는 것 같다.

 

# 정말 인상깊은 씬이 몇 개 있는데, 하나는 스코필드 일병이 강에 빠져서 정신도 잃고 길도 잃은 상태에서 벚꽃잎을 보며 다시 길을 찾아가는 씬이었다. 영화 초반 아직 두 병사가 함께 여정을 떠나고 있을 때, 한 체리농장의 벚나무들이 모조리 쓰러져 있는 걸 발견한다. (체리가 버찌이고, 체리가 자라는 나무가 벚나무인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부모님이 농장을 하셨던 블레이크 일병은 체리에 대해 해박했는데, 스코필드 일병이 이 나무들은 다 망한거냐고 물어보니 '다시 자랄거라고' 말한다. 이후 블레이크 일병은 죽고, 스코필드 일병 홀로 총격을 피해 강으로 떨어져 몸도 마음도 의지도 모두 꺾인 그 마지막 순간에, 강을 따라 떠내려오는 벚꽃잎을 발견하게 된다. 그 벚꽃잎을 보고 스코필드 일병은 다시 힘을 내어 2연대 병사들을 찾아나가기 시작한다. 블레이크 일병이 벚나무들이 다시 자랄거라고 말했던 것처럼, 스코필드 일병의 의지 역시 다시 살아난 것이다. 작위적이지 않냐고도 할 수 있지만 자그마한 벚꽃잎이 내려오는 걸로 이정도의 감동을 주다니, 나는 그 연출에 정말 감동했다.

 

# 또 다른 백미는 마지막 순간 스코필드 일병이 참호를 건너 돌격하는 데본즈 2연대 병사들을 뚫고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달려가는 씬이다. 넓은 초원 위, 독일군 쪽으로 달려나가는 영국 병사들과 부딪혀가며 홀로 다른 방향인 통제실로 달려가는 스코필드 일병의 마지막 질주는 전율이 일 정도였다. 이미 약간 늦어버린 스코필드 일병이 조금만 더 늦으면 무의미한 살상이 발생하기 시작할테고, 블레이크 일병의 형까지 죽으면 모든게 무로 돌아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1분. 포스터에 나와있는 '그들이 싸워야 할 것은 적이 아니라 시간이었다'는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알게되는 순간이었다.

 

# 2시간도 안되는 러닝타임 동안 전쟁의 희노애락을 직접 겪는 것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다가 마지막 엔딩에선 내가 다 안도감과 함께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샘 멘데스 감독의 할아버지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기초로 만든 영화라고 하는데, 전쟁 속에 있는 병사들이 어떤 일을 겪게 되는지에 대해 가장 생생하게 (어쩌면 조금은 과장된?) 영화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한다. 전쟁영화를 좋아한다면 꼭 한번 보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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